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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연산, 曾 정경부인 許 씨 부인 정려각 정밀한 관리 보수 要17세때 남편 사별 , 유복자 안고 걸어서 개성서 연산 시가까지

[논산=충청종합신문] 김백수 기자 = 허씨 부인 정려각 현재 모습과 허씨부인 묘역에서 치러지는 시제 모습이다. (사진제공=굿모닌 논산)

[논산=충청종합신문] 김백수 기자 = 조선초기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 대감의 딸로 태어난 허(許)씨는 나이 열일곱에 연산의 광산김씨 문중의 후예인 김약채(金若采)공의 아들 문(問) 과 혼인 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翰院)에 뽑혀 들기도 했고 예문관 검열에 발탁되기도 했으나 얼마 안가서 세상을 등졌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남편의 죽음에 애통해 하던 허씨부인에게는 아들 철산(鐵山)을 두고 있었으나 어린나이에 홀로된 딸의 정상을 딱하게 여긴 부친 허응 공은 딸을 개가시키기로 결정하고 혼처를 물색 하기에 이르렀다.

남달리 총명했고 부녀자의 절개를 목숨처럼 여겨야 한다고 배워온 허씨부인은 부친의 그런 결정을 전해듣고 하나된 아들 철산을 등에 업은채 시중드는 몸종 하나만 데리고 시댁 연산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늦은 가을에 개성을 떠난 허씨 부인이 연산면 고정리 시가에 도착한 것은 한겨울, 날은 춥고 눈비바람은 세찼다

전해져 내려오기를 호랑이가 허씨 부인의 길안내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윽고 시가에 도착한 허씨 부인이 대문을 두드려 문을 연 하인에게 자초지종을 고하고 시댁에 들이기를 청했지만 하인으로부터 사연을 전해들은 시아버지 약채(若采)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시아버지 약채 공 또한 어린 나이에 청상이 된 몸으로 외로운 삶을 살게 될 며느리가 새로운 혼처를 찾아 새 삶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음직 했다는 내용이 있다.

시댁의 문전박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허씨부인은 시댁 대문 앞 잔디마당에 간신히 비바람을 피할 움막을 짓고 호곡하며 자신을 며느리로 받아들일 것을 간청 했다.

그러던 중 날은 춥고 눈이 소복하게 내린 어느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정상을 딱하게 여겨 움막을 살펴 보니 밤새 내린 눈이 들녂에 소복히 쌓여 있는데도 며느리의 움막이 있는 자리에는 눈이 범접하지 않고 따뜻한 온기마져 느껴졌다.(허씨부인이 움막을 짓고 기거 했던 현장에는 양천 허씨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던가 부인으로부터 그말을 전해들은 시아버지 약채공은 이를 며느리를 받아들이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허씨부인을 집안에 들였다.

허씨부인은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외에 집안 대소사를 가지런히 추스르는 한편 유복자인 아들 철산의 훈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철산이 낳은 네 손자 국광(國光]), 겸광(謙光), 정광(廷光), 경광(景光)의 학업에 모든 정성을 다 했으므로 해서 큰 손자인 국광은 조선세조조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으며 둘째 손자인 겸광은 예문관 검열 동부승지 우부승지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 했다.

셋째 손자 정광은 제용감 첨정을 지내고 넷째 손자 경광은 군기사정겸 교서관 판교를 지내는 등 그로부터 극성기를 맞은 광산김씨 문중은 셀 수 없는 관학(官學)의 인재들을 배출 하는 가운데 허씨 부인의 7대손인 사계 김장생은 기호유학의 벼리인 율곡 이이의 적통을 이어받아 조선예학의 종장으로 존숭 되는 가운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정립한 장본인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사계 김장생 선생을 흠모하는 유가의 문도들이 학문을 닦고 덕행을 함양하던 돈암서원 숭례사 담벼락에 전서체로 새겨져 있는 ‘지부해함 박문약례 서일화풍(地負海涵, 博文約禮, 瑞日和風) 땅이 세상을 짊어지는 포용성을 기르고 넓고 깊은 학문을 닦아 예를 실천하고 화기로운 햇살같은 부드러움을 가져라’는 글 또한 일부에서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가르침을 축약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사계 김장생 선생의 인품을 나타낸 글이라는 설도 있으나 바로 그 열두글자 가르침이 허씨 부인이 아들과 손자들을 훈육하는 지침이었을 것이다라는 해석도 있다.

그로 인해 광산 김씨 문중은 허씨 부인을 문중 중흥의 시조모로 존숭, 매년 10월 하순에 연산면 고정리 사계 김장생 선생 묘역의 허씨부인 묘역에서 치러지는 허씨 부인 시제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광산김씨 문중의 후예들이 모여 허씨 부인을 기리고 있다.

당시 조정은 이같은 허씨부인의 뛰어난 절개와 학 덕행을 기려서 세종 2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요역을 면제했고 세조 13년에는 연산 고정 수구밖 큰길 옆에 허씨 정려가 세워졌으며 영조 21년 지금의 거정리 마을 앞으로 이전했다고 돼 있다.

정려각 안의 삼강 행실록의 기록은 ‘허씨 본관은 양천으로 대사헌 허응의 딸이다. 검열 김문의 아내가 됐는데 나이 17세에 남편이 요절하였다. 부모가 불쌍히 여겨 시집보내려고 약속을 이미 정했다. 이에 허씨가 이를 알고는 바로 아이를 업고 급히 시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서 평생을 마쳤다. 이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우고 표창했다라고 적고 있다.

한편 11월14일 연산면 고정리에 소재한 허씨부인 묘역과 정려각을 돌아본 굿모닝논산 김용훈 대표는 이나라 곳곳에 절개를 소중히 여긴 열부들의 정절을 기리는 정려가 많이 세워져 있으나 허씨 할머니의 절개에 더한 자식 훈육의 정성 등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 번씩 이사를 했다하여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맹모삼천 지교(孟母三遷 之敎)에 버금하는 이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사표가 되고도 남는다고 말했다.

또 당국의 무관심으로 정려각 옆의 수백년된 느티나무는 관리소홀로 부러져 나간채 간신히 새순이 움트고 있고 또 정려각 입구의 문틀이 파손되는 등 보다 철저하고 정밀한 보존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또 허씨 할머니의 일대기는 논산지역을 대표하는 공연물로 제작하거나 논산정신을 알리는 교육교재로서도 손색없는 내용이어서 논산시는 물론 문화재 당국의 성찰이 있기를 기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굿모닝 논산 2018년 11월14일자 기사

김백수 기자  bsk729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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